안녕하세요. 다섯 번째 말풍선레터를 보내드립니다. 12월 달력이 ‘1일’ 월요일부터 시작하다 보니, 한 달의 시작이 사뭇 비장해지네요. 올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헤아려 보기도 하고, 내가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게 되는 연말이 되었습니다. 하반기에는 늘 벌여 놓은 일과 새로 들어오는 일이 몰리면서 바쁘게 지나가고, 은행잎이 다 떨어질 즈음에서야 비로소 한가한 계절로 진입하네요.
본격적인 ‘비수기’를 앞두고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다 보면, 누구로부터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인데도 오히려 편히 ‘휴가’를 내거나 공식적인 ‘쉼’을 잘 챙기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젤라또 가게 ‘녹기전에’를 운영하는 사장님은, 아이스크림의 대표적인 비수기인 12월과 1월에는 가게 문을 닫고 공식적인 쉼을 갖는다고 하더라고요. 주로 산책, 책 읽기, 명상을 하며 쫓기지 않는 시간을 보낸다는 말을 들으니, 저도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육아와 살림이 지속되는 삶이라 그러기 쉽지 않겠지만요. '느슨하고 건강하게'를 이마 위에 띄우고, 달리기와 다른 운동을 더 챙겨보려고요. (헬스장 1년을 덜컥 결제하고 옴)
이번 호에는 올여름과 가을에 몰입했던 작업에 대해 정리해보았습니다. 폐지를 활용한 ‘종이 공예’인데요. ‘예술인 파견사업’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 보고서 글과 별개로 제게 어떤 인상으로 남았는지 생각해 보며 문장을 써보았습니다. 만들기가 참 재밌다는 생각과 ‘창의교육’의 부자연스러움 사이에서 여러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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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풍선 추천곡 🎧
영화 <세계의 주인>에 간간히 흘러나오던 음악.
바흐의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Sheep may safely graze) 입니다.
저도 클래식은 잘 모르는데 이 곡은 어찌어찌 플레이리스트에 있었어서,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반갑게 들었네요. 영화의 씬들이 우루루 몰렸다가 감정이 환기되어야 하는 순간에 잔잔히 나왔던거 같아요. 요즘 산책하며 듣기에도 좋은 곡이라 소개드려요. 영화를 안보셨다면 꼭 사전정보 없이 극장에서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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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 만들기는 참 재밌다
종이가면을 꾸미는 손길이 분주하다. 알록달록한 실과 솜, 그리고 마스킹 테이프 간단한 재료를 가면 위에 꼴라쥬 하면서 금세 만들기에 몰입하는 분위기가 교실에 번졌다. 뚝딱 만든 가면을 쓰고 소품과 의상을 걸친 아이들은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포즈를 취했다. 그중 몇몇 아이는 자신의 모습에 꽤 심취했다. 이어서 작은 패션쇼를 열어주니 조금 더 과감하고 적극적인 몸짓이 이어졌다. 올해 예술인 파견 현장에서 아이들과 진행하던 연극 워크숍 장면이다.
얼굴이 가려지자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모습은 일종의 해방처럼 보였다. 어린이에게도 나름의 사회생활이 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에 올라간 아이는 집단을 지나며 사회적 자아가 생긴다.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서 주변에 보여주는 얼굴, 집에서의 아들과 딸로서의 얼굴, 학교에서는 학생의 얼굴, 친구들 속에서의 얼굴,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또 다른 표정들. 어른이 되어가면 더 많은 표정이 생길까. 혹은 표정을 숨기며 희미한 얼굴이 될지도 모른다.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지역아동센터에서는 예술가 팀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워크숍이 열린다. 처음엔 야외에서 활동하며 흐르는 이야기들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올해의 장마와 폭염, 갑작스러운 가을장마가 우리의 바람을 여러 번 막았다. 실내 활동으로 틀어지자 수업을 잇는 서사를 쌓기가 어려웠다. 저학년과 고학년이 섞인 구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요즘의 어린이들은 이미 ‘체험과 학습’으로 빽빽한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너무 많이 주어진 자극 속에서, 한주에 한번 만나는 경험은 금새 휘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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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멕시코 ‘망자의 날’ 행진이 눈을 오래 붙잡았다. 커다란 해골 가면을 쓰고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생을 떠난 영혼을 맞이하기 위해 저마다의 가면과 조형물을 들고 길을 걷는다. 십 년 전, 마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고립사와 자살을 추모하는 문화제를 열었을 때, 사람 키보다 큰 탈을 쓴 배우가 골목을 걸었다. 그때 평범한 공간이 전혀 다른 결을 띠는 모습을 보며, 가면의 힘을 깊이 기억하게 되었다. 아이들과 그런 행진을 해보면 어떨까. 만든 가면을 쓰고 동네를 천천히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현실과 다른 장면을 함께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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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만든 가면을 쓰고 함께 동네를 행진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만들기와 연극, 그리고 야외 활동이 결합된 괜찮은 기획이었다. 먼저 시행착오를 겪기 위해 프로토타입을 시작했다. 유튜브에서 본 대로 박스를 자르고 머리에 맞게 얼추 골격을 세우며 글루건으로 붙여갔다. 사슴 가면을 만들어볼까. 최근 읽은 소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에 등장하는 ‘심판자로서의 사슴’을 떠올리며 ‘두셰이코의 사슴’이라 이름 붙였다. 둥근 머리틀에 코, 주둥이, 귀, 뿔이 하나씩 붙으며 형태가 확장되었다. 박스와 글루건이 생각보다 빠르고 견고하게 붙었고, 뚝딱 만들어져 가는 입체에 빠르게 몰입했다.
밀가루 풀도 인터넷 레시피대로 물과 함께 끓이자 쫀득한 질감이 완성되었다. 신문지를 찢어 풀을 바르고 골격의 빈틈을 메워 갔다. 처음엔 흐물거리던 종이가 2~3겹 쌓이자 풀의 무게로 묵직해졌다. 밤새 건조시키니 수분이 사라져 단단하고 가벼워졌다. 큰 붓으로 물감을 칠하니 어딘가 밋밋해 보여, 이면지를 찢어 만든 종이죽과 물감을 섞어 질감을 입혔다. 사슴의 코와 뿔, 윤곽선에 포인트가 생기며 캐릭터가 또렷해졌다. ‘괜찮은데…?’ 그 후 2주 동안 두세 개의 가면을 더 만들었고, 집 안은 종이와 아크릴물감으로 어질러졌다. 분리수거 날이 되면 상태 좋은 박스와 계란판, 신발 보호재 등 특이한 종이를 수집하기 위해 수상쩍게 서성거리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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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워크숍 날, 5학년 남자아이들은 책상위에 쌓인 폐지를 보고 시큰둥했다. 하지만 화면에 띄운 레퍼런스가 나오자마자 그들은 갑자기 바빠졌다. “선생님, 여기 뿔 달고 싶은데요!” “지느러미는 이렇게 할까요?” 아이들의 손짓은 더 빨라지고, 나는 그 옆에서 가끔 부품을 건네는 기술자처럼 조용히 도왔다. ‘그래, 이 맛을 아는구나.’ 혼자 속으로 웃었다. 평소 수업보다 꽉 채워서 돌아간 그들을 뒤로하고, 다음 수업을 위한 기술연구(?)와 더 나은 버전의 종이죽과 점토를 즐거이 개발했다.
그렇게 5주간의 가면 만들기가 끝나고 고학년과 저학년의 취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가면들이 완성되었다. 마침 10월에 열리는 지역축제에 퍼레이드가 있었고, 아이들과 가면을 쓰고 쿵짝쿵짝 거리를 활보하는 상상으로 들떴다. 하지만 현장기관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서 무산되었다. 가면은 만들었지만 어떤 몸짓이나 행진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채 우리의 교실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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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사슴 멋있다!” 가면의 완성을 기다려 온 우리 집 아이는 내가 만든 사슴가면과 우주가면을 무척 좋아한다. 4살이 된 아이는 이제 유치원 진학을 앞두고 있다. 어떻게 아는 건지 알고리즘에 숲 유치원, 공동육아 어린이집 광고가 내 피드에 불쑥불쑥 올라온다. 대부분 창조적인 예술경험과 숲활동을 주요 포인트로 선전한다. 어린이에게 주어지는 즐거운 창조활동들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길에서는 특목고 준비 학원 차량이 지나가고, 그 안의 아이들은 대부분 스마트폰 화면에 빠져있다.
파견 기간이 끝난 날,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뛰어놀았다. 프로그램을 해야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난 서로의 편안함이 놀이터에 흘렀다. 어른의 사정으로 갑자기 찾아왔다가 떠나는 우리는,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 얻고, 또 조금 미안함을 품고 돌아간다. “가지 마요, 다음 주에도 와요!” 포옹하며 말하는 아이도 있었고, 핸드폰 게임에 바쁜 아이도 있었다. 만들기의 즐거움은 찰나였다. 아이들이 집으로 가져간 가면은 아마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종이를 찢고 붙이는 동안만큼은, 아주 작은 세계 하나를 같이 만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만들기는 참 재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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